신천지 동향 및 불법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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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신앙]하나님과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이만희 씨

마스터 0 928
하나님과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이만희 씨
장운철 목사의 신천지 교리서 <요한계시록의 실상> 분석 34
3530440195_nOoWyBYM_9055322018b10bb7ec48facc6bbef56b7d3d610e.gif 2009년 07월 17일 (금) 08:40:57 장운철 기자 3530440195_1a2BF8lk_7d4236f306d144b5b55ce2c38c04f3d6d41e8cc7.gif kofkings@amennews.com 3530440195_KeApNfEn_33f556606eb533ca418e5a7103ff37c09fb56d2a.gif

만약 어떤 이가 이만희 씨의 책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도서출판 신천지, 2005)을 다 읽은 후 ‘맞아! 정말 참된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야!’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이 책의 저자인 이 씨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꼴이 된다. 저자가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 어느 부분이든(창세기든 요한계시록이든) 읽고 ‘예수=그리스도’라는 결론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는 역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심각하게 벗어나게 된다. 참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 대행자로 특별한 존재를 이 땅에 세우셨다는 식의 논리도 마찬가지다. ‘오직 예수’ 외에 ‘예수 대행’이라는 개념이 성경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읽을 때 그 본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함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는 성경을 읽을 때도 동일하다.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바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수 차례 강조한 것처럼 ‘문맥’을 통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맥을 통해 글을 읽으며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기초적인 방법 중 하나가 ‘강조점’을 찾는 것이다. 그 강조점은 반복되는 용어에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 글을 읽으면서 반복되는 용어(단어나 절)가 나오면 이는 십중팔구 저자가 그것을 말하고 싶어한다는 뜻이 된다. 

   
▲ 이만희 씨(PD수첩 촬영)

요한계시록 19장 처음 부분을 읽다보면 이러한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온다. 무슨 말인지 직접 살펴보자. 아래 계 19:1-5절까지의 성경구절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한 번 ‘쭉~’ 읽어보길 바란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말이다. 그러면 마치 살아서 튀어오르는 듯한 용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19: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19:3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19:4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계 19:1-5 개역성경) 

‘할렐루야’가 발견되었는가? 그렇다. 계 19장은 소위 ‘할렐루야’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본문이다. 직접적인 용어가 계 19:1-5 사이에만 3번 등장한다. 5절의 “하나님께 찬송하라”(Praise our God - NIV)는 부분도 사실상 같은 의미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6절부터 시작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 부분도 ‘할렐루야’로 진행됨을 볼 수 있다. 

계 19장 전체에서 ‘할렐루야’라는 용어가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그 핵심 주제가 ‘할렐루야’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단순한 반복만이 아닌 내용상으로도 그렇게 된다. 이것이 계 19장을 읽는 포인트가 된다. 

계 19장을 해설한 이만희 씨의 책을 살펴보자. 이 씨는 먼저 19장의 첫 번째 단락을 1-6절까지로 구분했다. 6절의 시작은 “또 내가 들으니···”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통상적으로 내용이 바뀌는 대목이 된다. 영어성경(NIV)도 이 부분을 “Then I heard what”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 이후에 내가 들었다. what 이하를···”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계 19:1-6절을 통해 이 씨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살펴보면 그의 문단 단락 나누기의 의도를 짐작하게 된다. 그는 계 19장 첫 단락을 통해 다음 3가지의 소주제를 정했다. ‘1. 이 일 후의 허다한 무리, 2. 참되고 의로운 심판, 3. 세세토록 올라가는 연기’ 등이다. 한 마디로 ‘무리, 심판, 연기’ 등의 용어가 19장 첫 단락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허다한 무리’라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1-6절까지 단락을 무리하게 정한 것으로 보인다. 1절에 이어 6절에도 그 용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씨도 반복 용어가 강조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데 왜, 그의 눈에 ‘할렐루야’가 핵심으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이 씨의 관점에서 계 19:1-6절까지의 핵심이 ‘무리, 심판, 연기’라는 용어로 보인 모양이다. 이 씨는 ‘할렐루야’를 ‘연기’를 뒷받침해 주는 정도로 사용하고 말았다. 가장 기본적인 성경 읽기가 안 되면 이렇게 관점이 틀려지게 된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결혼해? 

읽기가 안 되니 해석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게 된다. 계 19장에서 이 씨의 성경 오해의 극치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장가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웃자니 에너지가 낭비될 것 같고, 안 웃자니 달리 감정을 표현할 방법도 없다. 필자의 표정 관리가 ‘난처’해졌다. 

이 씨의 주장은 이렇다. 그는 계 19:7-10까지를 ‘어린양의 혼인잔치’라는 것을 핵심 주제로 삼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아주 잘 발견했다. 그게 핵심이다. 그런데 누구와 누가 혼인잔치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극과 극으로 달라지게 된다. 

혼인잔치에 대한 이 씨가 주장한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장가들었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는 예수님께서 한 목자를 택해 장가든다’는 것이다. 그의 한심한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하나님께서 초림 예수님에게 장가들어 하나가 되셨던 것(호 2:19, 요 10:30)처럼 예수님도 마지막 때에 한 목자를 아내로 삼아 장가드신다. 예비한 어린양의 아내는 바로 예수님의 예언자와 대행자인 사도 요한의 입장으로 모는 목자이다(계 22:17)”(이 씨의 책, pp.412-413).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는 말이다. ‘하나님(남자) - 초림예수(여자)’의 결혼관계가 마지막 때에는 ‘예수(남자) - 한 목자(여자)’의 결혼관계로 된다는 것이다. 이게 성경 계 19:7-10까지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이 씨는 혼인관계를 ‘장가들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의 주장을 계속해서 살펴 보면 예수님이 ‘여자’에서 ‘남자’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혼인관계에서는 예수님이 신부의 모습으로, 한 목자와의 혼인관계에서는 예수님이 신랑의 모습으로 그 ‘성’이 바뀌게 된다. 그렇게 되는가? 

또한 이 씨는 ‘하나님이 예수님께 장가들어 하나가 되었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며 ‘호 2:19’과 ‘요 10:30’의 구절을 들어 사용했다. 과연 그 성경구절이 그런 뜻일까?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죄악된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혼인’이라는 용어로 잘 표현해 주고 있는 책이다. 이만희 씨가 예를 든 2:19은 하나님께서 죄악에 빠진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선언하는 말씀이다. 호 2:23에서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러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혼인관계’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호 2:19에 ‘혼인’(혹 ‘장가든다’)이라는 용어가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 - 예수님’과의 혼인관계 내용은 전혀 없다. 그 그림자도 없다. 이만희 씨의 비성경적 상상일 뿐이다. 

그가 또 예를 든 ‘요 10:30’은 어떠한가? 그 구절에서 ‘하나님 - 예수님’ 혼인관계가 나타나는가? 성경본문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이다. 이 때의 ‘하나됨’이 소위 ‘부부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의미를 말하는 것일까? 정말 코미디다. 

요 10:30의 ‘하나됨’은 그 전후 문맥을 통해 읽기만 하면 그대로 이해되는 게 아닌가?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하셨다(요 10:10).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0:28). 그 영생, 즉 구원의 사역에 관하여 목적하심과 행동하심이 ‘하나’가 된다고 이해하는 게 올바르지 않을까?(F.F. Bruce, p.407).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기만 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이 씨는 자신의 주장 ‘하나님이 예수님께 장가들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며, ‘장가들다’와 ‘하나’라는 그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구절을 찾아서 사용했을 뿐 그 성경 본문의 내용은 동과 서가 다른 것처럼 전혀 맞지 않았다. 

이 씨의 주장은 의미와 상관없이 단순한 단어 퍼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엡 4:5)라는 성경구절까지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혼인관계가 복잡해지지 않을까? 

   
▲ '하나님-예수님' 결혼했다고?

천사가 보혜사라고? 

이 씨의 성경 해설은 읽다보면 종종 ‘내가 왜 이러한 책을 읽고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상식의 ABC, 국어의 ABC조차도 갖추어 있지 않은 그의 해설 능력(?) 때문이다. 필자가 이렇게까지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씨는 계19:10을 해설한다면서 그 구절의 ‘천사’를 ‘보혜사 성령’과 동일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직접 살펴보자.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한 본문의 천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로 약속한 ‘진리의 성령 보혜사’의 입장에 있다(요 14:26). 진리의 성령이라 함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요 17:17)을 가지고 오는 자(계 1:1)라는 말이며 보혜사는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요 14:24) ‘보혜사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여 보낸 대언자이므로 ‘다른 보혜사’라 한다(요 14:16)”(이 씨의 책, p.416). 

이런 논리다. 성령님은 예수님에 관해서 말씀하시는데, 본문(계 19:10)의 천사가 예수님에 관해서 말했기 때문에 그 천사가 바로 성령님이 된다는 식이다. ‘A=B’이고 ‘B=C’이므로 ‘A=C’가 된다는 형식의 지극히 단순한 방식을 차용한 셈이다. 마치 ‘우유 사 와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큰 아들이 작은 아들에게 시켰기 때문에 큰 아들이 아버지가 된 것과 같다는 꼴이다. 

이만희 씨가 이렇게 무리수를 둔 것은 다름 아닌 ‘이만희 = 보혜사’라는 논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이 씨는 계속된 계 19:10의 해설을 통해서 바로 그러한 주장을 하고자 한 것이다. 역시 직접 들어보자. 

“계시록 1장 1-3절과 10장에서 본 바 보혜사의 입장에 있는 천사가 택하여 쓰는 사람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해 받는 사도 요한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성령의 대언자’로서 보혜사의 입장에 놓인다. ··· 계시록 성취 때가 되면 보혜사 성령이 함께하는 대언자 곧 사도요한의 입장으로 오는 목자가 출현하여···”(이 씨의 책, p. 417). 

무슨 말인가? 보혜사 입장의 천사가 택한 사람도 역시 보혜사의 입장에 놓인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관련 성경구절 사용하기를 즐기는 이 씨가 이 부분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비슷한 구절이라도 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계 19:10의 천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대언했다. 진리의 말씀은 전하는 이는 보혜사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그 천사가 성령님이 된다는 것이다. 보혜사인 천사가 한 사람을 택했는데 그도 역시 보혜사가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만희 씨는 바로 ‘그 보혜사가 바로 나(이만희)다’라는 주장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는 이 씨의 책 겉표지에 이미 암시되고 있는 바와 같다. 

계 19장 두 번째 단락인 6-10절까지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핵심 내용이다. 계17-18장에서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결국 성도들을 맞이하신다는 내용이 주된 관점이다. 혼인의 대상은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바로 ‘성도들’이다. 예수님의 혼인의 대상은 어느 특정 인물이 아니다. 성도들이다. 왜!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보면 된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배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그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6하-8).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아내 삼은 성도들에게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신 것이다. 이 성경구절에 ‘하나님 - 예수님’ 혼인관계나 ‘보혜사 입장의 누구’라는 개념은 없다. 전혀 없다. 

예수님과 성도의 혼인 관계의 의미는 아래의 성경구절이 잘 말해 주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5-17). 

위 의미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는 말이 된다. 하나님의 진실된 통치 아래 있을 때 정말 우리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고백, ‘할렐루야’가 있게 될 것이다. 이만희 씨도 그러한 진실된 고백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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