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 동향 및 불법사례

신천지 동향 및 불법사례


[교회와신앙] 이만희 씨 보는 게 하나님 보는 것이라고?

마스터 0 1169

 

이만희 씨 보는 게 하나님 보는 것이라고?
장운철 목사의 신천지 교리서 <요한계시록의 실상> 분석 37
3530440195_y9p3qI7i_5dc4b66370172586dae7ad486d53aeb7f4ddcd7c.gif 2009년 10월 16일 (금) 08:00:55 장운철 기자 3530440195_9yUk3OWh_b0bbb77ff03276eea2460b5135684705188c1c8b.gif kofkings@amennews.com 3530440195_9GcuI2J4_7b599e7eda4c5dee5bb0ad0276326fd6e65a036b.gif
 
교회 밖의 논리와 교회 안의 논리가 다르다. 교회 밖은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 ‘내가 나의 주인이다’는 식이다. 즉, ‘나’ 자신이 중심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나는 못한다’, ‘나는 미련하다’, ‘나는 연약하다’ 심지어 ‘나는 죄인이다’는 고백이 이어진다. 이는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미련하지만 주님이 도우시면 참 지혜롭게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미련하지만 주의 명철로 풀 수 있다’는 의미와도 같다. ‘나는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말이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 자신의 미련함과 죄인됨을 발견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갈수록 깊이 있게 알아가는 것이다. 그 작업이 기쁨이요, 영광이요, 능력이다.

누군가가 신앙생활을 한다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신의 능력, 신분 등의 어떠함을 도에 지나치게 자랑하듯 한다면 그러한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둘 중에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다. 성경이 무엇인지 또 어떤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성경의 말씀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그가 진정한 신앙인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둘째 이유다. 진실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성령께서 언제나 동행하신다. 그분께서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회개케 하시고 고쳐주신다. 그렇지 않은가?

이만희 씨의 책 <천국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도서출판 신천지, 2005)을 분석하면서 줄곧 드는 마음은 ‘그는 이 책을 통해서 무엇을 드러내려고 하는가?’이다. ‘하나님인가 아니면 이만희 자신인가’하는 점이다. 그의 책에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교회 등의 기독교적인 용어들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씨 글의 논리는 결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2장을 해설한다면서 이 씨는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결국 이만희 씨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얼토당토하지 않다. 어이가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의 괴상한 주장을 필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정리해봤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육체인 사람이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 영이 거처로 삼은 사람(고전 3:16)을 보며 섬기는 것은 함께하는 그 영을 보며 섬기는 것과 같다. 초림 때 하나님께서 임하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었듯(요 14:9) 계시록 성취 때에는 예수님께서 임하신 거룩한 성의 이긴 자(계 3:12, 21)를 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보는 것이요 예수님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된다”(그의 책, p.481).

계 22:4을 해설한다면서 한 말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이긴 자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긴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본 분석을 통해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 바로 ‘이만희=이긴 자’라는 게 이 씨의 주장이다. 그것과 연결시켜 보면 ‘이만희 씨를 보는 게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가 나온다.

   
▲ 이만희 씨를 보는 게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주장

이 씨는 위와 같은 자신의 주장이 성경의 내용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몇 가지 성경구절들을 나열했다. 증명이 될까? 그가 열거한 성구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위의 성구들이 ‘이만희 씨 보는 게 하나님 보는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해 주는가? 어디에서 그런 해석이 나올 수 있는가? 이만희 씨도 위의 성경구절들만 나열했을 뿐이지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보충해 주는지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런저런 성경구절들을 많이 나열하기만 하면 마치 ‘성경적인 주장’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일 뿐이다.

위의 성경구절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첫 번째 구절(요 12:44-45)은 공생애 후반부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구원자임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특별히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임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두 번째 구절(요 10:30)이 이 씨의 주장을 옹호해 주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요 10:30은 그 이전인 요 10:29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성경구절을 먼저 자세히 살펴보자.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29-30).

“My Father, which gave them me, is greater than all; and no man is able to pluck them out of my Father's hand. I and my Father are one.”(요 10:29-30, NIV)

두 구절을 연결해서 보면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내용이 무엇인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붙잡은 사람을 세상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시지만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어찌나 잘 반응하시던지 그 목적하심과 행동하심이 항상 하나임을 밝혀 보여주신다는 의미다(F.F. Bruce, p.407).

이는 다음의 예수님 말씀과 직접 연결되기도 한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17:12 참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행하신다는 뜻이다. 구원을 위해 계획하셨던 일을 예수님께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행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 이만희 씨(pd수첩 촬영)

세 번째 구절(계 3:20)은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말씀이다. 그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것에 대해 질책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만희 씨의 어떠함을 드러내 주는 구절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럼 이만희 씨가 궁금해 했던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계 22:4)는 어떻게 해석하는 게 올바를까?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면 즉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게 했다(출 33:20,23). 신현, 즉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든가 아니면 환상, 꿈 등을 통해 계시해 주셨다. 직접 나타나신 것이 아니다. 왜 그럴까?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죄인인 사람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본 자가 죽는 것은 어찌 보면 하나님이 죽인다기보다, 자신의 죄로 스스로 죽게 된다고 보는 게 더 옳다.

신약시대에 와서 상황이 달라졌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나를 본 자는 곧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4:9). 그렇다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똑 같은 분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 이만희 씨가 오해를 한 것이다. 비유의 달인(?)인 그가 어찌 이 부분에서는 문자 그대로 보았는지 모르겠다. 성부와 성자는 다른 위(person)로서, 다만 예수님을 본 자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본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지금은 제한된 특권이지만(고후 3:18, 히 9:7), 완성된 천국에서는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상태에서 누리는 무제한적 특권이 될 것이다(권성수, p.474).

계 22:1-5은 ‘완성될 천국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하나님을 본다’(4절)는 것과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5절)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여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한 영광이 기다려지지 않은가?

이만희 씨는 언제까지 성경을 오용할 셈인가? 또한 자신을 드러내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필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는 이만희 씨의 얼굴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게 보인다. 뭘까?
0 Comments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