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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X파일 전격공개 | 이단사이비 대책위원회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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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X파일 전격공개 | 이단사이비 대책위원회 소식
이단대책위원회 | 조회 994 | 2018.04.2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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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X파일 전격공개

목차
이만희 총회장의 X-파일 전격 공개
이만희의 출생과 어린 시절
1931년 7월 13일(음) 경북 청도군 풍각면 현리 702번지, 이만희(혹은 이희재)는 이재문과 어머니 고상금 사이에서 11남매(10남 1녀) 중 여섯째로 태어남.
맏이는 일본에서 사망, 두 아들 일본, 셋째 부산에서사망. 여덟째가 딸임. 현재 7명 생존.
현재 이만희 양자로 입적한 이전근(가명 이전우, 현 부평 마태지파장)은 셋째 형님의 아들임.
부친은 농사와 참외 원두막 농사, 매를 날리며 물레방아 찧고 삶.
풍각에서 현재 부인 유천순을 만나 결혼함.
일곱째 이만대가 제일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건축업에 종사하였고, 이만희도 뒤따라 상경하여 함께 일함.
이만희가 교회를 간다고 그 부모가 이만희를 핍박.
이만희 조부(이삼봉)는 이만희가 5~6세 때 사망함.
초등학교 재학시절 급장(반장)을 하기도 함.
이만희의 병력과 전도관 입문
11남매 중 이만희를 비롯한 몇 명이 선천적(모계)으로 한센병(문둥병) 환자임. 그 중 이만희 바로 윗형인 이만용(현재 장터에서 기계 수리업) 씨가 가장 심한 상태였고, 이만희는 언뜻 보면 표가 나지 않을 만큼 심하지 않으나 의사가 보면 쉽게 알 수 있음. 그래서 동네에서는 이만희를 “보얀 문둥이”라고 불렀다고 함.
총을 직접 만들어 꿩을 잡기도 했다고 함.
한센병 때문에 모자를 즐겨 쓰고 다녔고, 이를 비관하여 직접 만든 총으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음.(이 같은 사실을 이만희는 자신의 간증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핍박으로 자살하려 했다고 거짓말을 함)
27세경 자칭 이긴자, 감람나무, 두 증인이었던 박태선의 전도관에 만병통치 생수교리를 전해듣고 한센병 치료를 위해 풍각 전도관에 나감.(이를 본인의 간증 시 성령의 인도로 전도관에 가게 되었다고 거짓말함)
한센병으로 눈썹이 없고, 모발이 희며, 수염이 없고, 치아가 의치이며,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주사를 맞고 있음.
풍각에서 경기도 소사 신앙촌으로 이사한 후 전도관에서 10여 년간 벽돌 굽는 기술을 익혀 유천순과 함께 많은 고생을 하며 노역함.
과천 장막성전에 입교 및 출교
1968년 가을경 유재열의 설교를 듣고 감동되어 장막성전에 입교함.
입주자를 위한 건축과 경비일을 맡는 등 역군으로 노역하며 헌신함.
이때 전도관 출신이었던 김풍일(자칭 보혜사), 구인회(자칭 재림 예수) 등도 장막성전에 함께 있어 알게 됨. (구인회, 김풍일, 이만희는 전도관과 장막성전 동기 동창으로 각각 70년, 74년, 80년에 각자 교회를 창립-개업함)
장막성전 창립 1966년 6월 1일로부터 3년 반인 1969년 11월 30일 시한부 종말설이 끝나갈 무렵 통일교 출신의 목영득이 장막성전에 은밀히 잠입해 들어옴.
이만희는 전도대장이었던 송동원, 역군대장이었던 갈렙 심재권 등의 인도로 자칭 하나님이자 자칭 실로였던 목영득을 따르고, 장막성전 교주였던 어린종 유재열은 이들을 당을 지은 배도자로 규정하여 공개적으로 출교함.
이들과 6개월 정도 함께하다 이탈하여 70년 경 시골로 낙향함.
참고) 장막성전 시작일은 1966년 6월 1일임.
신천지에서 장막성전의 전신으로 부르는 초막은 1966년 6월 1일부터 24일까지 지었음.
1966년 당시 사람들은 이 초막을 ‘장막'이라 하였고, 그 후에 건축한 예배당을 ‘성전’이라 함. 그래서 두 이름을 합쳐 ‘장막성전’이라고 함.
그러므로 신천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1966년 2월 17일 초막에 올라가 100일간 성신으로부터 양육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사실 무근임.

이만희의 낙향과 사이비 교주를 위한 준비
이만희는 낙향하여 성경공부에 전념하며, 성구 암송을 즐겨하고 다녔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할렐루’ 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함.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만희가 성경책을 받아먹고 한 번에 계시를 받아 성경을 통달한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학습을 통하여 성경을 암송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는 지금까지도 아전인수로 성경을 해석하고 외워 써먹고 있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음.
70년에서 77년, 이 시기에 서울을 왕래하며 70년에 자칭 재림예수로 출현한 구인회(천국복음 전도회, 초막절 교회)의 ‘실상교리’와 74년에 다른 보혜사로 출현한 김풍일(실로 등대교회, 새빛 등대교회)의 ‘말씀의 짝 비유풀이’교리를 접하면서 후일 신천지에서 모방, 도용함.
백만봉의 제자가 되는 이만희
장막성전 7천사 중 한 천사였던 백만봉은 유재열과 결별 후에 심재권, 송동원의 인도로 수유리에 설립된 목영득의 '제8일 교회’(자칭 목영득은 하나님과 실로/송동원은 재림 예수/신영철은 카인/심재권, 이영길은 두 증인)에서 강사로 잠시 몸 담았다가 77년 서울 만리동에 ‘재창조교회’(유재열은 처음 창조-백만봉은 재창조)를 설립하고 자칭 ‘주의 이름으로 오는 보혜사’, ‘이긴자’, ‘두 증인’, ‘하나님 아버지’임을 선포하고, 77년1월부터 80년 3월 13일까지 시한부를 선언함
이만희는 76년도에 아직 교회가 없이 도봉동에 있던 백만봉을 찾아갔으나, 백만봉이 이만희에게 자신이 부를 때까지 시골에 내려가 있으라고 해서 다시 시골로 내려감.
77년 말경 백만봉은 자신의 제자로 있었고 이만희와 친했던 전해인과 조영환을 청도에 보내어 다시 이만희를 서울로 불러올림.
백만봉은 지재섭(현재 베드로 지파장), 김대원(지재섭의 자형), 홍종효(현재도 신천지에서 두 증인으로 거짓 증거 하는 한 사람), 이영길 등을 7사자에 임명하고, 이만희, 이만춘(이만희의 형, 11남매 중 아홉째), 조영환(12사도 수장) 이찬선, 심재권, 심재식 등을 12사도에 임명하고, 24장로도 임명함.
당시 이만희는 수염이 없다 하여 ‘내시’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함.
79년 9월 사당동에서 약 120명 모였을 때 백만봉은 이만희가 12사도 중 ‘단 지파’ 같고, ‘가룟 유다’같은 자라고 예언하듯 설교한 적도 있고, 그 후 인덕원에서 한 번 더 그 같은 설교를 한 적이 있음.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시한부 마지막일인 1980년 3월 13일 정오 12시에 약 120명이 경마장 앞산에 천막을 치고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뒤늦게 나타난 백만봉은 “여러분 수고 많았다. 나는 오늘부로 주의 역사를 끝낸다. 그리고 나는 3일 내로 하늘에 올라간다. 그간 낸 헌금은 다 돌려주겠다.” 선언했고, 이에 분개한 이만희의 처 유천순은 강하게 항의하며 몸싸움을 벌였으며, 갑자기 돌변한 이만희의 태도에 분개한 백만봉은 차를 타고 가던 중 내려 이만희의 뺨을 3차례 때리기도 함.
이만희는 이러한 사실을 거짓으로 숨기고 있고, 최근에는 실상의 연도까지도 변개하는 등 거짓말쟁이 마귀 자식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음.
계시록 2~3장 편지 사건의 진상
편지는 대부분 홍종효가 주도해서 썼고 이만희는 홍종효로부터 “당신도 한 장 써 봐라!”고 핀잔을 주어 한 두 장 쓴 것이 전부임.
편지의 내용은 계시록 2장~3장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유재열의 사적인 문제를 담고 있었고, 그것이 허위 사실로 판명되어 허위 사실 유포와 명예 훼손으로 이만희, 홍종효는 실형을 선고 받음. 상식적으로 계시록 이장과 삼장의 내용대로 편지했다면, 고도로 종교적 비판의 자유가 폭넓게 보장된 우리나라의 현행법상으로는 처벌을 받지 않음. 그러므로 이만희와 홍종효가 처벌받게 된 것은 성경과 무관하게 허위사실로 개인을 비방하여 명예훼손으로 실형을 살게 된 것임.
계시록의 7별이라는 장막성전의 7사자에게 유재열 외에 누가 편지를 받은 사실이 있는지 물어보라!
7별의 실상에 유인구가 들어갔다, 신종환이 들어갔다 오락가락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편지의 발신자가 수신자를 몰라 헷갈리는 것은 치매가 원인인가, 거짓말의 미정립인가?
향적산(계룡산) 국사봉 40일 입산 사건의 진상
이만희, 홍종효는 1980년 10월 27일 명동 스카라극장 옆 별다방에서 체포되어 태능경찰서로 압송되었고, 구치소에 구금되었다가 98일 만인 1981년 2월 2일에 출소됨. 삼청교육대니 갖은 고초, 고생이니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며, 당시 50대는 심한 일에서도 제외되었었다고 함.
선고유예기간 3년이 끝나는 1983년 말부터 84년 초까지 홍종효는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유재열을 비롯해 장막성전과 국내외 많은 교회 주소록을 입수하여 약 만통에 가까운 편지를 등기로 보냄.
이러할 즈음에 이만희는 종적을 감추었음. 이에 화가 난 홍종효가 수소문 끝에 국사봉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국사봉으로 찾아가서 확인한 결과 신상훈(종교세계관심사를 만든 인물, 이만희가 계시록 6장 청황색 말의 실상이라고 하는 자)과 함께 차소녀 할머니 처소에 있는 이만희를 보고 분통을 터트림. 알고 보니 이만희는 홍종효가 편지를 다시 보내기 시작하자 또다시 구속될 것이 두려워 국사봉으로 피신함.
후에 이만희는 이 기간에 계시를 받고 책 두 권을 기록해서 내려왔다고 거짓말을 함.
‘신탄’과 ‘계시록의 진상’ 에 관한 진상
통일교의 아류인 교주 진진화의 생령교회 출신인 김건남, 김병희는 이만희로부터 장막성전을 배경으로 한 소위 실상 교리를 듣고 혹하여 통일교 교리와 생령교회 교리 위에 실상 교리를 접목, 혼합하여 교리서인 ‘신탄’과 계시록을 자의로 해설한 해설서인 ‘계시록의 진상’을 저술함. 그래서 ‘신탄’은 김병희, 김건남 공저로, ‘계시록의 진상’은 이만희 저, 대필자 김병희로 출간함. 꿈도 꾸지 못할 보석(?)을 접한 이만희는 베스트셀러를 기대하며 도서출판 신천지 이름으로 출간하여 교보문고, 종로서적 등 전국 유명서점에 보급함. 기대와 달리 판매 저조로 정가 9천원에서 6천원으로 인하하여 보급하기에 이름. 그 두 권의 책은 서울 소재 모든 대학교 도서관에 기증까지 했음에도 잘못되어 폐기처분한 책이라고 파렴치한 거짓말을 하고 있음.
1985년 입교해서 명강사로 소문이 났던 김건남은 이만희를 가까이서 겪어본 지 1년여 만에 다방에서 마지막으로 이만희를 만나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탈퇴함.
“내가 거지새끼에게 황족의 옷을 입혀주고 간다.”
이 후 이만희는 ‘계시록의 진상’을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저자를 자신으로 하여 그 책이 그 책인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여 신천지 모든 신도들이 구입하게 함. 그 이유는 원가 2~3천원인 것을 1만~1만 5천원에 판매하니 3~4만 권만 판매해도 수입이 짭짤하니까!
참고) 윤재명이 국사봉에서 실상을 교육한 자료를 확인해보면 신탄과 계시록 진상을 이만희가 직접 쓴 것이라고 가르친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1980년 3월 14일 신천지 역사 시작과 ‘시한부 역사 완성 예언’ 불발 사건
백만봉의 제자로 있으면서도 평소 이만희가 “백만봉이 이루어도 좋고, 못 이루어도 좋다. 못 이루면 내가 이룬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벌써부터 때를 기다렸던 것을 알 수 있음. 시한부 종말설이 불발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3월 14일 백만봉에게서 나온 양을규, 홍종효, 김종택, 이만춘 등 10여 명이 인덕원에 있던 이만희의 집에서 첫 예배를 드리며 신천지를 개업하였다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줌. 이 날 홍종효가 대표로 기도하고, 이만희는 계시록 1장을 설교하면서 자신을 ‘사도요한’이라 증거함.
덕원 이만희 집, 모세 장로 신종환의 집, 동산 아파트 지하, 비산동으로 처소를 옮기면서 보좌 구성과 6일 창조 후 7일째 안식의 시한부 역사를 완성한다는 예언으로 사이비 교주의 사기 행각은 시작됨.
이만희도 처음에는 첫 장막을 모방하여 7천사의 실상을 이만희, 홍종효, 홍종기, 이종호, 신문배, 이찬선, 장희문이라 했다가 한 사람씩 이탈하면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 넣는 등 애들 장난 같은 일을 함. 12사도와 24장로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작태를 볼 만했음.
‘1일=1년’으로 해석하여 1981년을 창세기 1장 6일 창조의 첫째 날로 보고, 1987년 9월 14일을 일곱째 날 곧 남자(영)와 여자(육)가 하나되는 신인합일의 영생불사가 이루어지는 날이라 하여 기대가 만발했던 때가 있었음.
드디어 그날이 되었지만 조용히 넘어갔고, 한 해가 지난 1988년 어느 날 이만희는 전도관과 장막성전을 거쳐 신천지에 와있던 오천평(별명) 권사님 등 여러 신도들을 불러 각서를 받음. 내용을 잘 모른 채 각서에 서명했던 신도들은 그 내용이 “나는 이만희 선생님이 일곱째 날인 1987년 9월 14일까지 이 역사를 다 이룬다고 말한 것을 들은 사실이 없다”라는 내용인 것을 뒤게 알고 분개함. 이 일로 그들 중 20여 명이 이탈해서 역곡에 있는 조희성의 영생교로 간 사실이 있음.
이만희는 ‘시한부 역사 완성 예언’의 불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창세기 첫째 날의 시작이 1981년이 아니라 넷째 날에 일자와 사시와 연한이 이룬다고 했으므로 1984년으로부터 다시 날짜를 계산해야 한다는 간교한 거짓말로 슬쩍 넘어갔음.
미루어진 그날이 가까워지면서 창세기의 6일 창조 7일째 안식은 ‘1일=1년’에서 ‘1일=1천 년’으로 점차 바꿔지고, 1990년대에 무료신학원이 설립되면서 시한부는 유야무야되었음. 그때의 경험으로 이만희는 절대 시한부를 정하지 않고 다만 “2~3년만 있으면”, “144,000명이 차기만 하면” 등의 교활한 수법으로 신도들을 독려하고 꾀고 있음.
그 결과 현재는 전도관과 장막성전 출신 윤요한(본명 윤용식), 윤재명 형제(현재 동대문 교회, 화정교회 담임), 그리고 장막성전 출신으로 백만봉의 제자였던 지재섭(현재 베드로 지파장)과 통일 교아류인 생령교회 출신 이복영(전 시온기독교신학원 총원장), 백만봉의 신도로서 이혼하고 위자료를 다 바쳤던 조O자(한 때 총회본부 및 요한지파의 OO부장) 등 사이비 교주들 밑에서 이단 사설에 오랜 동안 깊이 세뇌되었던 자들 외에 초창기 신도들이 누가 남아 있는가 보라!
이만희의 애첩들
1983년경에 백만봉에게서 이만희에게로 넘어온 조O자(한 때 총회본부 및 요한지파의 OO부장)는 이만희의 사랑을 받은 첫 번째 여자임. 이로 인해 이만희의 처 유천순과 조O자가 지금까지도 원수지간으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은 신천지 내에 많이 알려진 비밀임.
신천지 교회가 인덕원 사거리에 있을 1988년경에 40대 중년의 여자 전도사들 그룹이 있었는데 그 중에 송O봉이 있었음. 어느 날 이만희는 송O봉에게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고 영화를 본 후에 “아들을 낳아 달라”는 말을 했고 사건을 만들었음. 이러한 사실을 당사자들이 말하지 않은 이상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믿음이 좋은 탓에 자랑스러웠는지, 어리석은 탓인지 송O봉은 이러한 사실을 동료 전도사에게 털어 놓았고, 이 이야기는 계속 확산되어 그 일로 여자 기둥 전도사들이 신천지를 떠나는 일이 있게 됨.

그때 이만희는 화근이었던 송O봉을 내치기는커녕 멀리 성남 교회로 보내는 수준에서 일단락 지었고, 오히려 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사로까지 임명하였으니 의리 있는 사나이가 아닌가! 또한 송O봉도 성남으로 발령받아 간 후에도 거처를 이만희 곁 평촌에서 옮기지 않았으니 이 또한 열녀 아닌가! 인덕원과 인접한 평촌의 송모봉의 집도 이만희가 그곳에 가까이 두기 위해 집을 사도록 했다고 전해짐. 이만희는 거처를 구하는데 돈을 보태주었다며 이를 자랑하였다 전해짐.
1989년경에 순복음 교회에서 신천지로 들어온 박O미(*)의 출현은 10년 이상 박O미 전성 시대를 열었고, 이만희와 박O미의 사랑(?)은 90년 6월 사당동에 기독교 무료 신학원을 설립하고 그곳에 마련한 박O미(초창기부터 사당 신학원 강사)의 살림방에서 시작되었음.
\\이러한 사실은 당시 사당 신학원을 자주 찾았던 신천지 신도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음. 이만희는 하루도 사당 신학원을 찾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였고, 박O미의 권세와 교만은 안하무인격으로 하늘을 찔렀음. 외박이 잦고 이러한 소문을 유천순도 알게 되면서 박O미도 유천순과 지금까지 원수가 되어 있음. 심지어 둘은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까지 했으니 애첩의 위세가 대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이를 아는 이만희의 양자 이전우는 조O자와 박O미에 대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갖은 욕설을 하며 지금까지도 벼르고 있음.
화곡 시온교회 강사 심O영(*)과의 ‘과속 스캔들’의 진상을 당사자인 심O영의 증언을 통해 들어보면 이만희가 여신도와 둘이서 애정 행각을 할 때는 다음과 특징이 있음.

개인적으로 만날 때는 항상 승용차 대신 지하철을 이용하여 만남.
인덕원 사거리와 안산 지역의 모텔을 주로 이용함.
처음 만나 가던 날 편의점에 들러 술과 안주를 사서 들어감.
처음 만나 모텔을 찾아 들어가는데 지리를 잘 알고 있고, 너무 자연스러운 것을 보면서 “나 뿐만이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었음.
100세에 아들을 낳아 달라고 말하기도 했음.
영등포에 있는 심O영의 숙소에까지 찾아와 언제든 올 수 있도록 열쇠를 달라고 요구함.

2003년부터 2006년 말까지 약 3년간 관계를 지속하다가 신천지 이탈자들의 폭로로 신천지 간부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자 다급해진 이만희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김포에 있는 심O영을 찾아가서 그렇게 말한 사실이 없다고 하라고 종용함.그러한 일이 있고 나서 바로 심O영은 대전의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됨.
이 기회에 더 이상의 여성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언한다면 이만희가 속셈을 가지고 접근할 시에는 단호히 거부, 거절의 의사 표시를 분명히 하라는 것. 지금까지 피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이만희는 접근 시 당황하거나 두려워서 가만히 있으면 신앙심을 악용해 욕심을 채우고, 거부하거나 반항 시에는 강제로 추행하지는 않는다고 함.
이 외에도 이만희의 공식 행사가 아닌 은밀한 지방 행차 시 모시는 애첩들이 전국 도처에 즐비하다는 사실은 JMS의 정명석과 그 소속이(사이비 교주) 동일함을 증거해주고 있음.
이러한 일들로 가장 힘들었을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중전마마이었으리라.
일주일에 2~3일을 외박하고 후궁의 처소로 드는 임금님에게 분한 마음을 달래준 것은 주(酒)님이었고, 오랜 세월 속에 늘어나는 것은 주량이었으니, 그 결과 신천지의 대표적 주당이 탄생함. 알콜 과다 섭취로 간에 무리가 와서 119에 실려 한림대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던 사건은 계시록의 3가지 비밀 이상의 비밀임.
‘이만희는 고자’라는 낭설의 진상
격암유록(*)은 전도관의 박태선을 구세주, 진인, 정도령, 이긴자, 감람나무로 만들기 위해 박태선의 측근이 만든 위서임에도 조희성의 영생교, 이영수의 에덴성회 등 전도관의 아류 집단이 교리서처럼 중히 여김. 이만희도 역시 초창기부터 격암유록을 많이 인용했으며, 심지어 남사고 예언초, 격암유록의 내용을 액자에 담아 계시증거인 이만희라 하여 낙관을 찍어 판매하고 보급하여 신도들 중에는 이 액자를 가정에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 가관인 것은 격암유록의 내용을 이만희의 계시록 해설서인 ‘계시록의 진상’ 뒤에 부록으로 싣기까지 했으니 격암유록이 위서임을 아는 사람라면 이만희의 정체는 자명함. 바로 이 격암유록에 정도령 구세진인은 후사가 없다고 예언되어 있는 부분을 인용하고, 성경 마태복음에 언급된 ‘고자’에 대한 내용을 인용하여 이만희는 자신이 무자한 것도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설명함. 그러므로 이만희가 수염도 없고 무자한 것으로 알고 있는 신도들은 이만희의 여성 편력 문제에 대해 고자가 어떻게 여자 문제가 있을 수 있느냐고 따짐. 그러나 수염이 없는 것은 한센병이 원인이며, 무자한 것은 이만희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처 유천순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임.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만희에게는 유천순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난 딸이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이만희 고자설’은 여자 문제를 잠재우기 위한 목적과 이만희를 신격화하는 고도의 계산된 유언비어임.
이만희 처자의 믿음
그의 처 유천순과 양자 이전우는 이만희도, 영생도 믿지 않는다. 다만 절간 대웅전에 불상(이만희)을 모셔놓고 시주를 받아 챙기는 주지스님인 셈! 이만희는 영생 사기극과 여자 문제로 약점이 잡혀 있는 상태이니 집에서 유천순에게 ‘사기꾼’이란 말을 자주 듣는데(물론 주변에선 농담으로 듣겠지만) 그때마다 심장이 떨릴 것임.
이만희 본인은 물론 그의 처자가 걱정하는 것은 반드시 도래할 이만희의 죽음! 우리는 이만희의 영생 사기극의 결말이 어떻게 맺게 될 것인가를 매우 흥미롭게 지켜볼 것임.
불쌍한 신천지인들이여!
전술한 내용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반드시 확인해보십시오!

이만희와 그 처자도 믿지 않는 영생과 천국을 여러분만 믿고 있으니, 이만희 사후에 그대들에게 남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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